<야곱의 허리>로부터 왕(생명)들이 나오다 창 33:18-20; 34-35장 야곱(이스라엘)의 유랑생활에 관한 보도의 실질적인 끝은 밧단아람(외삼촌댁이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한 마을)에서 지낸 피신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고향 어구인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의 씨름이라는 매우 특수한 신체험(神體驗; 창 32장)을 거친 후, 마침내, 형과의 극적인 화해(和解)/해후(邂逅)를 하는 데에서(창 34장) 이루어진다. 그가 형과의 극적 만남[劇的 邂逅]를 끝내고 처음 자리 잡은 곳이 <세겜> 땅이었다. 그는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을 친 그 터를 그 곳 추장으로부터 은 백 냥(크시타=10세겔=정확한 액수 불확실)을 주고 사들였다. 말하자면 세겜 땅은 야곱(이스라엘)이 원주민으로부터 적정 값을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매입(買入)한 <야곱(이스라엘)의 땅>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하겠다(창 33:18-19).
이 시점에서, 야곱(이스라엘)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외쳤던 신앙고백이 또한 신학적으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즉 그는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외쳤는데(창 33:20), 번역하면, “엘(하늘님)은 이스라엘의 엘로힘(하나님)이다.”라는 말인데, 이 말의 의미는 가나안 족이 섬기고 있고 또 중동의 셈 족(族)이 널리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불렀던 그 <엘>(神)이라는 신(하늘님/하느님)은 알고 보니 이스라엘의 신(神)이신 <엘로힘>(하나님)이었구나! 라고 하는 [엘=엘로힘이라는] 의미이다. 한국적인 상황으로 풀이하다면, 한국인들이 전래적(傳來的)으로 믿어 왔던 <하늘 님(하느님)>은 알고 보니, 한국의 기독교인이 믿는 바로 그 <하나님>이었구나 라고 하는 새로운 각성(覺醒)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진정한 신, 참 신, 인류의 보편적 신앙의 대상인 신, 그 신(神, practical/implicit monolatry, cf. 족장시대)이 다름 아닌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나님(theoretic/explicit monotheist God, cf. 제2 이사야)과 다른 신은 아니었구나! 라고 하는 의미(practical/ implicit monotheism)의 말이 된다고 하겠다. 즉 실제적이고도 암묵적인 그 보편적 한 분 하느님은 교리(이론)적이고도 신학적으로 정련된 그 오직 한 분의 하나님과 결코 다른 신(神)은 아니었다는! 의미가 된다고 하겠다. 실로, 이것은 야곱이 그의 “험악한 세월”(창 47:9)을 지내오면서 겪은 삶의 체험을 통하여 깨달은 신앙의 한 결과를 이러한 각성(覺醒)의 결실(結實)로서 정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은 진실로 ‘신속하게 지나가시는 신’(elusive presence, 출 33:19a,22; 출 34:6a)으로서 ‘자신을 감추시는 분’(사 45:15, Deus absconditus)이시며, 단지, ‘긍휼과 은혜의 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무한하신 신’(神, ’el, 출 34:6[과연 어느 異端者가 구약의 하나님 야훼를 증오의 신, 심판과 복수의 신이라고 卑下하여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과 대립의 角을 세우게 만들었던가? cf. Marcionism!])으로서 부단히 신속하게 지나가기만 하는 우리네 시간의 역사 속에서 전적으로 <삶>의 체험을 통해서만 <경험/체험>되시는 분이실 뿐이다. 우리는 단지 ‘빠르게 지나가시는 그분의 등 뒤’(하나님의 자기계시)만을 볼 수 있을 뿐, 그의 얼굴(本體, panim: morphe)은 볼 수 없기(출 33:23) 때문이다. 이것은 야곱(=이스라엘 12지파들)이 깨달은 바, 대단히 위대한 신학적 각성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창 33:20). 그러므로 구약이 증언하는 신(神) ‘야훼’는 구약종교가 시작하는 그 초기 때부터(아마도 출애굽의 때부터, 즉 기원전 13세기, 시내 山의 토라啓示 때부터) 형상화/가시화/우상으로 새겨지는 것, 그것을 그 무엇보다 가장 강하게 금지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첨단 물리학에서 말하는, 소위 힉스(Higgs) 입자(粒子)라는 것도 또한 결코 신(神) 자체일 수는 없고, 단지 신(神)의 우주창조 활동의 한 도구(道具)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인간의 눈에 포착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이든 신(神, Elusive Presence)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창세기 편집구조에서 볼 때, 야곱(이스라엘)의 이러한 <위대한 신학적 각성>(大 覺醒, grand awakening)은, 깊이 생각해 보건대, 스티븐 호킹이 그의 『위대한 설계』 (Stephen Hawking, Grand Design, London: Bantam Press, 2010)에서 깨달은 바, 그 <위대한 천문물리학적 각성>보다 더 위대한 각성이라고 하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 바로 <세겜> 땅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그 사건의 경위(창 34:1-35:10)는 대강 이러하였다. 그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땅 정착기의 아주 초기에 있었던 일로서, 가나안 땅에 적응하는 과정 중에 일어난 한 에피소드이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세겜>은 이스라엘이 역사에 등장하기 전에는 이교(異敎)의 지방성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던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여기서 제단(祭壇)을 쌓고 <엘[하늘님]은 이스라엘의 엘로힘[하나님]이다!>라고 하였다는 성서보도는 이스라엘이 이 고대 가나안 제의(祭儀) 중심지를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려 하였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일종의 이스라엘 신앙의 가나안 토착화 작업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야곱은 여기서 절대 절명의 다음과 같은 체험들을 불가항력적으로 겪게 된다. 즉 세겜 사람들과의 접촉과정에서 겪은 생의 좌절경험, 즉 딸 <디나>가 세겜 족(族)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성폭행)을 당한 그 수치스러웠던 일과 이 사건에 흥분한 야곱의 아들들(디나의 남자형제들)이 아버지(야곱)의 충고도 거절하고 범한 수치스러웠던 그 반(反)신앙적 집단살해 복수 행위를 막지 못한 그 수치스러웠던 일, 이로 인하여 야곱은 세겜에서 겪은 그 모든 수치를 정화(淨化)시킬 중대한 결단을 한 후, 세겜 성읍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깨끗이 내어버리고[淨化하고] 떠날 것을 온 가속(家屬)에게 명령한 일 그런 다음, 세겜 대신에 <벧엘>(‘하느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지역)을 새로운 거주지로 정하고 거기에 <엘-벧엘>이라는(‘벧엘의 하느님’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새로운 제단을 쌓은 일 등등으로 그의 여정 전부를 끝내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부분은, 분명, 세겜 땅에서 겪은 그 수치스러운 경험을 정화(淨化)의 결단으로 극복하고 새 거주지와 새 제단을 세웠다는 사실이고 이와 동시에 이러한 야곱의 신앙적 시련극복을 옳게 여기시고 축복하신 야훼 하나님의 그 축복 사(祝福 辭; 창 35:10-12)가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등장하였다는 그 점이라고 하겠다.
분명, 야곱은 딸 ‘디나’가 이방인에게 뜻밖의 더럽힘을 받았다는 수치감과 좌절감을, 마치, “위기는 기회다.”라고 확신한 자처럼, 그 곳 세겜 땅, 그 기름진 땅, 이방인들로부터 대 환영을 받았던 그 땅을 과감히 다 내어 던져버리고, 마치 특별 세제(洗劑)를 사용하여 조그마한 세균까지도 다 틀어내듯이, 세겜의 은붙이 금붙이 보물들을 다 틀어내어버리고 그 곳 세겜을 떠났던 것이다. 그렇게 하였더니, 즉 모든 세겜의 화려한 금은보화를 다 버리고 황량한 루스 땅, 그러나, 구원의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땅,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는 이름을 그 곳의 지명(地名)으로 지었었던 그 땅[신 현현 장소, 창 28:19]을 향해 떠나갔더니(벧엘로 올라가자! 나알레 벧-엘, 창 35:3), 전능의 신(神)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미래를 축복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축복사’(祝福辭)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너의 이름이 야곱(‘남의 발뒤꿈치를 붙잡다.’ 라는 뜻)이지만 이제부터 네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神과 씨름을 하다.’ 라는 뜻)이다. 나는 전능의 신(神)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할라차임 ’, 히브리어 雙數, 生殖力의 根源으로 여겨진 兩 허리,)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너에게 주고 그 땅을 내가 너의 자손에게도 주겠다.”(창 35:10-12)
여기서, 신학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네 허리로부터 나오리라!”라는 말씀이다. 여기서 “허리”라고 한 말은 히브리어 “할라차임”[雙數]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바로 얼마 전, 얍복 나루에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싸움]을 하다가 하나님의 공격[심판의 일격]을 받아 부셔진(깨어진) 바로 그 허리, 즉 히브리어로는 “야레크”라고 하는 그 말을 조금 더 분명하게 일반적인 말로 밝힌 동의어(同義語)이다. 말하자면, 이 “야레크”(構文形으로 연결될 때는 “예레크” 즉 “예레크-야아콥” 등 참조)라는 말은 관용적(慣用的)으로는 <엉덩이뼈><환도뼈><허리><사타구니(고대 중동에서는 맹세할 때 손을 집어넣는 곳으로서 性器가 있는 부위 즉 生殖力의 자리를 가리킴, 창 46:26, 요츠에 여레코)> 등으로 번역되어 온 말(창 45:26; 출 1:5 참조)인데, 남자의 생식기능의 요체(要諦) 역할을 하는 곳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구약 신학적 문맥에서 보면,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주신 <후손번성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할 자리>, 그 곳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하늘의 별들, 바닷가의 모래들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그 신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리가 바로 이 “허리”인데, 아, 바로 이 <야곱의 허리>(예레크-야아콥)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깨어져 부서져버렸던 것이다. 야곱에게는 최악의 심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허리, 다 부서져 못쓰게 된 그 허리, 그 무너진 허리로부터, 마치 별이 자기폭발과 함께 죽을 때 그 뿜어낸 파편(破片)이 새로운 별(新星), 새로운 은하계, 초신성(超新星) 수퍼노바(1987년 2월 23일 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아이언 쉘톤이라는 천문학 교수가 발견하였다는 보도와 그 설명 참조)를 만들어내듯이, 그렇게!!, 야곱의 그 허리(예레크-야아콥), 그 무너진 허리로부터 장차 열왕(列王)이 – 뭇 [새]생명이! - 태어나리라는 축[복]사(祝[福]辭)를 선포하셨다는 점(창 35:11)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이 축[복]사의 중심에는 먼 후일(!) 하나님(하느님)의 아들[神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그를 따르는 바보 온달들)에게 주신 축복, 즉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그것을 통한 부활/영원한 생명에 관한 축복약속(祝福約束)이 들어 있었던 것이라는 <성서해석>(Biblical Hermeneutics)을 [시도]한다. 야곱의 깨어진 ‘허리’(=사타구니)로부터 열왕과 뭇 생명이 그리고 메시아들(=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 태어나리라는 ‘신의 약속’(神의 約束)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패배의 대속적인 죽음으로부터 ‘사망 권세’(죽음의 세력)를 깨뜨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창조해내어 주시겠다는 ‘신의 약속’(神의 約束) 사이에는, 흔히 성서신학계에서 말하는, <동형이론적인 성서해석>(typological interpretation)이 성립된다고 감히 주장한다.
‘생명’(生命)의 문제(생명의 존재, 생명의 출생, 생명의 소진[消盡], 생명의 재[再] 창조 등에 관한 문제)는 또한 역시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앞 장(章)에서(직전 칼럼에서) 길게 논의하였던 <성서에서 본 ‘죽음’과 ‘죽음 이후’>에 나타난 나의 주장 및 신앙고백을 전제(前提)한다면 이 문제(‘생명’에 관한 문제)는 반드시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성서신학적인 확신의 대 전제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따로 독립적인 논문으로서 <부록[논문 2]>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야곱의 <허리>」로부터의 생명탄생, 즉 「야곱의 <사타구니>」로부터의 생명탄생에 관한 역설적 증언(逆說的 證言), 즉 야곱의 부셔진 허리로부터 열왕(列王)이 나오리라는 오늘 본문(창 35:11)의 증언은 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부활이 창조된다는 기독교 복음의 분명한 한 ‘예표’(豫表; prefiguration)가 된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으로 이 칼럼을 결론지으려한다. 누가 감히 구약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으로부터 퇴출시켜야 한다는 따위의 마르시온적인 이단사설(Marcionite heresy)을 감히 부활시키려 할 것인가?
이러한 창 35:11의 <깨어진 허리>라는 표상은 족장들의 신앙전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 해방역사를 비롯한 이스라엘 구원역사 전체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하여 나타나는 표상이다. 즉 아브라함 생애의 절정인 모리아山 사건에서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고뇌의 순간을 극복하는 그 순간이 아브라함에게는 바로 그 <야곱의 허리> 사건에 유비(類比)될 수 있다면, 아마도, 의인(義人) 요셉이 피를 나눈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이집트 노예 상(奴隸 商)에게 팔려갔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는 이집트 전국의 국고(國庫)를 총괄하는 총리의 자리에 올라 있었을 때, 그러나, 그 무엇보다 자신을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넘긴 그 불공지대천의 원수인 형들이 오히려 운명이 뒤바뀌어 굶주림에 못 이겨 양식(糧食)을 구걸하려고 이집트로 내려왔다가 되레, 마치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듯, 총리가 된 그 동생 요셉 앞에 총리의 은잔을 훔친 중범죄인의 신세가 되어 오히려 목숨을 구걸하는 처지에 놓였을 바로 그 때에, 그 다 죽은 목숨을 ‘스올’[死地]로부터(시 130:1) 대 탕감의 용서와 구원(창 45:5; 50:19-20)을 받았던 야곱 전(全) 가문의 그 운명전이(運命轉移)의 순간이 또한 역시 요셉에게는 바로 그 <야곱의 허리> 사건에 유비(類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족장역사의 운명전이(運命轉移) 경험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야곱의 12 아들 공동체=이스라엘 12 지파 연맹체가 겪은 運命轉移의 경험들)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끈 긴 출애굽 구원역사에 나타난 운명전이의 경험들(출애굽기→여호수아서; 이집트 탈출→홍해와 광야→약속의 땅 가나안 입주 역사에 나타난 구원경험들), 사사시대의 무정부적 카오스를 통과하며 이룩해 놓은 초기 이스라엘 왕국들의 기적 같은 운명전이의 경험들,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과 신흥 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하여 이스라엘-유다 왕조 역사가 겪은 그 대 몰락(586 BC)으로부터 예상 못한 출(出)바빌로니아 해방(538 BC)이라는 대(大)구원을 선물로 받았던 그 운명급전이의 큰 경험(이사야書 1-39, 40-55)도 또한 모두가 <야곱의 허리> 표상(表象)이라는 문맥 안에서라야 바르게 해석되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미 출애굽기 1:5에서는! 요셉을 통하여 이집트로 내려온 이스라엘 자손들, 특히 출애굽 공동체를 이끌 출애굽 해방역사의 혁명주체 세력이요 그 공동체의 기본 모체인 그 <70인>(창 46:27→출 1:5; cf.칠십인 譯本과 사도행전 7:14의 75인)을 묘사할 때 이미(!!) 출애굽기 기자는 이집트로 내려옴으로 가나안의 살육적 대 기근으로부터 살아남아 장차 출애굽 해방을 주도하게 될 그 사람들(엘리트들?)을 가리켜서 그들을 <야곱의 허리>(예레크 야아콥)에서 나온 70인!!(출 1:5) 이라고 규정하였다!! 이 어찌 놀라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있으랴!
심지어는 헬라-로마 시대의 암흑기를 거쳐 온 후기 유대교의 새 유대 왕국이 드디어는, 예수의 예언대로(마 24:2; 막 13:2; 눅 21:6), 로마에 의하여 초토화된(70 AD & 135 AD) 이후, 1800여 년 동안 나라 없는 빙점하(氷點下)의 디아스포라 세월을 거쳐서 마침내 유엔(UN)의 승인 하에 <이스라엘>이라는 새 합법국가로 재(再)탄생(1948년 5월)된 그 역사도 또한 <야곱의 허리> 표상을 통해서만 올바른 신학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신의 공격을 받아 깨어진 그 <야곱의 허리> 표상은,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 구원역사와 세계 구원역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명하는 신학적 중심 축(軸)이 되고 열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창조주 하나님(=야훼 엘로힘)은 “무”(無; ouk-on)로부터 “비유”(非有; me-on)와 “유”(有; on)를 만들어내시되, 단지(!), <야곱의 허리>를 쳐 깨뜨리심을 통하여(!), 마치 수퍼노바의 죽음이 그 폭발과 함께 또 다른 새 성운(星雲, another nebula)을 만들어내듯이, (cf. David Mills, Atheist Universe, Berkeley: Ulysses Press, 2006, Pp. 94-95.) 그렇게 우리를 만들어내셨던 것이다. 실로, <야곱의 허리> 표상이 가진 이 신비야말로 <왜 우리는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라는 우리의 ‘존재’에 관한 궁극적인 천문물리학적/철학적/종교적 물음에 대한 성서의 최종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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