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죽음의 질병을 극복하는 길 - 시편 6편 김이곤 2014-06-272021-10-20 14:59

죽음의 질병을 극복하는 길 - 시편 6편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여덟째 현에 맞춘 다윗의 시[김이곤 私譯]


1(2) 야훼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2(3) 야훼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은혜를 베푸소서.

야훼여,

나를 고쳐주소서. 나의 뼈까지 흔들립니다.

3[4] 내 목숨까지도 매우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야훼이시니! 언제까지입니까?

4[5] 야훼여, 돌아와 나의 목숨을 건져주소서. 주의 자비하심으로 나를 구원해주소서.

5[6] 죽은 후에는 주를 기억할 수도 없사오니, ‘스올’에서 감히 누가 주께 감사하리까?

6[7] 나는 탄식으로 지쳤습니다. 내 침상은 밤마다 눈물홍수를 이루었습니다.

7[8] 나의 두 눈도 울화에 사무쳐 시력까지도 잃었습니다.

내 모든 대적들 때문에 온통 사면이 모두 캄캄해졌습니다.


 분위기 급전(急轉)


8[9] 악을 행하는 너희들은 모두 내게서 떠나가거라!!

야훼께서 나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으니.

9[10] 야훼께서 나의 탄원을 들으셨도다. 야훼께서 이렇게 나의 기도를 받아주시니,

10[11] 아, 나의 모든 원수들이 심히 떨며 부끄러워하고 급히 물러가는구나!!

초대 교회는, 이 시 속에 비록 ‘죄’ 또는 ‘참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일곱(7)개의 참회 시(懺悔 詩, penitential psalms; 6, 32, 38, 51, 102, 130, 143편) 그룹의 첫 번째 시로서 분류해왔다. 그러나 모빙켈(S. Mowinckel)이나 궁켈(H. Gunkel)이 정확히 분류하였듯이, 현대 시편연구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는 ‘개인 탄원 시’ 양식에 속한 시로서 ‘질병 시’라고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분석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시인은 자신이 수척하게 되어 심지어는 뼈까지 흔들려 목숨까지 위태로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심각한 질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또한 동시에 이 질병이 또한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에서부터 비롯된 결과라고만 믿고 있는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볼 때, 그리고 또 그 질병의 회복과 생명의 위협으로부터의 구원도 또한, 전혀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점 등에서 볼 때, 이 시 6편 시인은 아마 인간 삶의 전화위복(轉禍爲福)과 흥망성쇠(興亡盛衰), 및 생사화복(生死禍福)이 모두 전적으로 야훼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는 유일신신앙(唯一神信仰)에 확고히 서있는 기도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수수께끼는 전적으로, 시(詩)의 앞부분에 나타난 그토록 음울한 탄식 분위기가 전혀 아무런 이유 설명도 없이!! 갑자기 분위기를 반전(反轉)시키며, “악을 행하는 너희들은 모두 내게서 떠나가거라!! [야훼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라고 하는 구원 승리의 확신 분위기로 옮겨가는 분위기 급전(急轉)의 응답확신을 표현하였는데, 이런 현상이 과연 어떤 이유로 인하여 생기게 된 것일까? 라고 하는 점에 이 시의 수수께끼가 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그 무엇이 이 시에서 이러한 분위기 급전(急轉)을 일으키는 작용을 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아마도, 8[9]b절-9[10]절의 세 구절 체(3 phrases) 안에서 세 번이나 나타난 바, 기도 응답을 나타내는 동사표현인, ‘들으셨다’ ‘들으셨다’ 그리고 ‘받아주셨다’라는 세 개의 동일 내용의 동사(‘솨마아’[hear]→‘솨마아’→‘라칵하’[take] 동사)를 동의평행법적(同義平行法的) 형식으로 반복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볼 때, 아마도 여기에서는 사제(司祭)의 구원신탁(救援神託, Heilsorakel: oracle of salvation)이 시인의 확신표현 직전(直前)에 선포되었을 것이라는, 이른 바, 자주 우리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는 ‘사전(事前) 구원신탁선포(救援神託宣布)’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假說)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제나 예언자들의 ‘신탁’(神託, oracle)은 항상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코 아말) YHWH; YHWH thus said, “....”)라는 사자 전언 어투(使者 傳言 語套, messenger formula)를 동반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본문에서는 그러한 어투가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자 전언 양식(使者 傳言 樣式)이 전제되지 않고서도 거기에 그것이 전제(前提)된 것과 동일한, 또는 그보다 더 이상의 분위기 전환 작용을 일으킬만한 그 어떤 신앙적 동기가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럴만한 신앙적 요인을 이스라엘의 제의역사(祭儀歷史)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거룩한 전쟁 신앙 전통’이라고 추론해 본다. 즉 야훼의 전쟁 전승의 ‘제의 화’(祭儀 化)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러한 신앙전통이 강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러한 가능성은 분위기의 급전현상이 일어나는 탄원시들 안에 자주 나타나는 ‘군사용어들의 잦은 출현’ 현상을 통하여서 그 무엇보다 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본문의 문맥에서도 또한 “나의 대적들”(‘초르라이’) “나의 원수들”(‘오여바이’) 등의 용어들은 분명 군사적 문맥 안에 들어있는 용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사면을 둘러싸고 있던 저 대적/원수들이 갑자기 “떠나가거라!”(“쑤루!”)라는 한 제의적 외침(a cultic outcry) 소리에 놀라서 황급히 떨며 물러가는 모습은 ‘거룩한 전쟁 설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출 14:21, 27; 수 8:18c; 민 10:35-36).

폰·라트(G. von Rad)라는 한 독일 구약학자는 영국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열린 세계 구약학회를 통하여 발표한 한 논문(Der Heilige Krieg im alten Israel, Zwingli-Verlag: Zwingli, 1951)에서, 이 ‘거룩한 전쟁 신앙 전승’이 특히 구약 설화문학과 시문학에서 ‘신학적 제의 화 과정’을 통하여 신학 화될 때, 구약의 그 특이한 비(非) 폭력이념과 탈 전쟁이념의 역설적(逆說的) 평화이념이 극대화되었다고 주장한 그 논문의 신학적 중요성과 학문성은, 갓월드(N. K. Gottwald)의 좀 시각이 다른 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IDB Suppl., “War, Holy ”참조), 구약성서 해석 사에 있어서 하나의 ‘이정표(里程標; milestone)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야훼의 전쟁’에 관한 구약성서의 기술(記述)은, 그 이중구조에 그 특성과 묘미가 있다. 물론, 전쟁에 관한 구약의 기술(記述)이, 비록 그것이 설화의 형태로든 예언문학의 기술형태로든 아니면 시문학(詩文學)이나 묵시문학의 기법(技法)으로든 간에, 실제의 전쟁사건을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제의(祭儀, cult)를 통하여 경전문학의 어법으로 재연(再演)될 때는, ‘야훼의 전쟁’에 관한 기록들은 평화와 구원을 궁극목표로 하는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적 사건으로 재해석(再解釋) 진술되고 따라서 ‘야훼의 전쟁’에 관한 기록들은 오히려 인간의 전쟁참여를 강하게 부정하고 또한 인간이 전쟁에서 손을 떼기를 바라는 평화건설을 요구함과 동시에 모든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전유물(헤렘, 터부이즘, tabooism)임을 강조함으로서 전혀 전적으로 전쟁은 하나님에게로만 돌리기를 요구하는 성격으로 나타난다. 성서문학의 이러한 그 제의적(祭儀的)특이 구조(特異構造)!!를 설득력이 있게 규명한 학자는 폰 라트(G. von Rad, Der Heilige Krieg im Alten Israel, 1951)이지만, 그러나 그의 규명이 지닌 그 신학적 의의가 많은 학자들에게서 바르게 평가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성서의 전쟁설화들은 제의문학(祭儀文學)으로 재 표현(再 表現)될 때는, 흔히 오해되고 있듯이, 그 전쟁의 사실(fact)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전유물이고 그리고 그 승패도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 있으므로 인간은 전쟁에 손을 데서는 안 된다!!고 하는 전쟁금지!!(to put taboo on!!)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하여 ‘임마누엘’ 신앙(사 7:14b)을 유다 민족 국운(國運)의 지렛목으로 보았든 이사야 예언자도 외치기를, “이 사실에 대한 충분한 인지와 믿음이 없으면 인간은 그 누구든, 결코, 결단코, 굳게 설 수 없다.” 라고 확언하였던 것이다(cf. 사 7:9b). 즉 ‘전쟁’은 ‘하나님 자신의 일’(God’s own business)이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지(絶對依支) 신앙만(!)이 필요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가 예언자도 또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래서 다시는 군사훈련이 필요 없는, 이른 바, 사람마다 자기가 심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서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평화롭게 사는 그 세계>(믹 4:3-4)가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건설하시려는 세계요 성서가 목표로 삼고 지향(指向)하는 바로 그 세계라고 구약성서는 역설(力說)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특히 ‘세월호 침몰사건’(2014. 4. 16; 일명 구원파’ [‘한국 기독교 침례회’라는 간판을 단 사이비 종교의 한 ‘종파] 사건)으로 온 나라가 온통 거국적 패닉(panic) 상태에 빠진 요즈음(2014년 4, 5, 6월)의 한국사회는 그 무엇보다 ‘기독교’라는 종교(불교도 마찬가지)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엄격하고도 단호한 ‘자기비판’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비록 신(神) 개념에 대한 정의(定義)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신(神) 정의(定義)가 어떤 것이든 간에, 자신이 그가 섬기는 그 신(神)에 대한 신앙의 ‘절대 의지심’(絶對 依支心)/‘절대 신뢰심’이 확고한지에 대한 엄격한 자기성찰을 통하여 자신과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집단 또는 공동체를 향하여 자신을 분명하게 열어 보여주고 있는지가 그 무엇보다 시급하게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사이비 종파인 ‘구원파’의 특이한 행각이 참으로 맹랑하듯이, 우리네 종교 사회 전반(!!)이 참으로 맹랑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이나 일반 백성이 다르지 않고 모두가 다 죄를 짓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 그것(호 4:9)이!! 그 무엇보다 엄청나게 큰 위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이 무너진 그 종교의 지도를 받는 그런 사회란 결코 온전할 리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상의 이러한 큰 문맥의 틀 안에서 이 시가 세부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바, 그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그 ①첫째는 ‘죽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매우 특이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 ②둘째는 ‘질병과 죄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문제가, ‘죄’에 대한 한 마디의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 안에서 주요 주제로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 ③셋째는 ‘기도의 분위기 급전의 원인’에 관한 문제가 매우 뚜렷하게 적시(摘示)되고 있다는 점 등이라고 하겠다.


①‘죽음’의 세계를 이 시인은 ‘스올’이라고 부르면서 그 곳은 <주님을 기억하는 일과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일을 할 수 없는 세계>라고 정의한다. 비록 이러한 ‘스올’ 개념이 신약의 ‘게헤나’(陰府; 地獄; 저승), 즉 죽은 자들이 모여 있는 곳과 평행되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곳 ‘스올’은 단지 ‘살아있는 자들과의 관계가 끊어진 곳’이라고만 강조해서 부른다는 점에 그 특이점이 나타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도 또한 할 수 없는 곳’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둠으로서 이 시에서는 그러한 상황이 최상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곳으로서 선택되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구약의 ‘스올’ 개념은 통속적인 의미의 ‘내세(來世)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의 관념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땅 아닌 땅, 땅이 있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땅’(L. Kohler)과 같은 곳이다. 일종의 ‘무’(無)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하나님 찬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세계>를 가상하여 특별하게 강조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찬양을 할 수 없는 것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강조한 일종의 <최상의 문학적 강조어법>에 해당한다(롬 8:38-39. cf. 룻 1:17)고 하겠다. 일종, <죽음>의 상대화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은 우리를 죽게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기 때문이다(신 32:39; 삼상 2:6).

②‘죽음’의 개념을 이렇게 ‘상대화’함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인의 ‘질병’의 ‘고통’(고난)에 관한 문제가 이젠 신학적 반성의 중심문제로 떠오른다. 즉 ‘질병’이라는 ‘고난’을 ‘야훼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시 6:1[2])의 결과라고 역설(力說)한다. 그리하여 초대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독자들이 이 시 속에는 ‘죄’ 또는 ‘참회’라는 말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참회 시’라는 장르로 분류한다. 말하자면 ‘질병’=‘죄의 결과’라는 등식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러나 ‘질병’은 단순히 ‘죄’와 ‘인과관계’(因果關係)로 엮기는 것은 신학적으로 볼 때, 문제가 된다. ‘질병’이라는 ‘고난’은 ‘죄’와의 관계가 없이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욥기>가 제기한 중대한 신학적 문제요 주요 이슈이기도 하다고 하겠다.

본문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서 보면, 시인의 생명을 위해(危害)하는 그 ‘질병’이 비록 야훼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의 결과라고 보고는 있으나 그러나 질병을 ‘죄’와의 ‘인과관계’로만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시의 분위기 급전환(急轉煥)이 일어나는 곳, 그 어느 부분에서도 ‘참회’(죄 고백)의 암시가 전혀(!) 없기 때문이고 또 시인의 기도응답이 이루어지니까 두려워 떨며 패퇴(敗退) 당하는 것도 또한 죄(罪)가 아니라 시인의 ‘원수(怨讐)들’ 뿐(시 6:10[11])이기 때문이다.

③이 ‘원수’(怨讐 또는 對敵)라는 언어가, 이 시(詩)에 나타난 ‘분위기 급전’이 일어난 사건의 앞과 뒤를 감싸고 있는 주요 언어와 주요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에 신탁 선포가 전제되지 않고 있는 것이 확실한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이 시의 이러한 분위기 급전의 동기는 ‘거룩한 전쟁 전승 신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보게 한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은 ‘전쟁의 용사’(출 15:3)이시며, 동시에, 야훼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관장하시는 분(신 32:39; 삼상 2:6)이시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 처한 백성이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호소해 오면(출 14:10; 시 6:1-7[2-8]) 즉각 전능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을 내어 미시고(출 14:21,26) 원수들을 신속 완결하게 패퇴(敗退)시키시길 것이기(출 14:27; 시 6:8-10[9-11]) 때문이다. 그렇다. 전쟁의 승패는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삼상 17:47).

그러므로 죽음의 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기도는 또한 역시 오직 그, 바로 그 야훼 하나님에게만 향하여 “오, 야훼여, 돌아와 나의 목숨을 건져주소서. 주의 자비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 6:4[5])라고 외치는 기도여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