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제목약자(弱者) 편이신 ‘공의(公義)의 하나님’, 야훼 - 시편 9~10편 운영자 2015-12-112021-10-20 15:00

약자(弱者) 편이신 ‘공의(公義)의 하나님’, 야훼

시편 9-10편

시 9:8[7]-17[16](시 9-10편의 핵심 부분만을 추출하여 본문으로 삼는다.)

8[7]절 야훼! 그분은 영원토록 심판을 행사하실 자기 고유의 심판席을 준비하셨도다.

9[8]절 그분은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공정으로 백성들을 판결하실 것이다.

10[9]절 야훼! 그분은 억울한 자들이 피신할 요새이시며 고난의 때에 피할 요새이시므로,

11[10]절 주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주를 의지하리니, 오, 야훼! 주께서는 주를 따르는 자들은

결코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12[11]절 너희는 시온에 좌정(坐定)하셔서 통치하시는 그분 야훼를 위하여 노래하여라.

그분의 행적들을 온 백성 가운데 널리 널리 전하여라.

13[12]절 왜냐하면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들을 추적하시는 그분은 그들을 반드시 기억하시나니!

그분은 고난 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에는 결코 모르는 체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14[13]절 야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죽음의 문턱에서도 끌어올려주시는 주님이시여,

나를 미워하는 자들로부터 받는 나의 고통을 살펴보옵소서.

15[14]절 그리하시면 주께서 받으실 모든 찬양을 모두 전파할 것이며

주님께서 베푸신 그 구원행적을 딸 시온의 성문에서 소리 높여 외칠 것입니다.


16[15]절 저 이방 나라들은 자기들이 만든 함정에 자기들이 빠짐이여,

자기들이 몰래 쳐놓은 덫에 자기들의 발이 걸려드는구나.

17[16]절 아, 야훼께서는 자기를 알리시어 심판을 행하시니,

악인은 자기가 쳐놓은 덫에 자기 발이 빠지는구나.


시 10:17-18

17절 오, 야훼여! 주님은 약한 자들의 간절한 애원을 들어 주시는 분,

그들의 마음을 굳세게 붙들어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시는 도다.

18절 고아와 억압받는 자들을 변호해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의 공포가 없게 하시는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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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알고 있기로는, 야훼 하나님은 절대 <공의(公義)의 신(神)>이시므로, 즉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분이시므로(마 5:45), 그러므로 그의 ‘공의’(公義)는 그가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그 정확한 ‘똑 같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들 믿어왔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사’(創造史)와 ‘구원사’(救援史)를 병행시켜 놓고 대조해 보면, 마태 5:45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의인과 악인에 대한 ‘똑같은’ 배려를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無理)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 구원 사를 통하여 그런 구원사(약자 구원사)의 빛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함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편당성’(偏黨性)이 더 뚜렷하게 들어나기 때문이다. 즉 인간 구원역사 속의 하나님은 철저히 ‘강자’의 편이 아니시고 ‘약자’의 편이시며, ‘불의한 자’(악한 자)의 편이 아니시고 ‘의로운 자’(선한 자)의 편이시라는 것이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의 8-13[7-12]절에 나타난 바,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또한 전혀 전적으로 ‘억울한 자들’과 ‘고난 받는 자들’의 편이 되어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들로부터 억울한 자들과 고난 받는 자들을 지켜 보호하시고 심지어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셔서 그들을 끌어올려 주시는 분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이러한 편당 성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아예 <심판의 신>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서를 통하여 계시(啓示)된 신(神), 야훼 하나님에 대한 대단한 오류를 유발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은 결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이다.

우리 본문의 시 9:16-17[15-16]과 시 10:17-18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행위가 전적으로 악인들의 행위에 대한 ‘부매랑’(boomerang) 형식으로만!! 묘사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경이적(驚異的)인 놀라움이다. 왜냐하면 핍박 자들의 모든 결국은 <자기가 만든 함정에 자기 자신이 빠지고 자기가 몰래 쳐놓은 덫에 자기 자신이 걸려드는 것>(시 9:16-17[15-16])으로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심판(審判)의 신’이 아니라!! ‘구원(救援)의 신’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사적 관점에서 성서를 보면, 성서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심판행위는 단지 ‘구원을 위한 전 단계(前 段階)의 행위일 뿐’이다. 우리의 본문 시9-10편은 이 사실에 대한 웅변적인 증언이다.

드디어(!), 야훼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시어 심판을 행하시지만,

악인들은 단지 자기들이 쳐놓은 덫에 자기들의 발이 빠질 뿐이다!!
(시 9:17[16])


실로, 이 시인이 깨달은 바, 악인들(불의한 자들)이 자신들의 악행으로 받는 그 ‘신의 심판’은, 어디까지나, ‘부매랑(boomerang) 형식’으로만 나타나는 것이라고 인식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신학적 각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은 ‘심판의 신’이 아니라! ‘구원의 신’이시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경우의 ‘심판’은 언제나 ‘구원’의 전 단계(前 段階)로서, 일종, 구원[사]의 ‘매개체’(媒介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후기 묵시문학(cf. 다니엘, 요한계시록 등)에서는 ‘최후의 심판’ 사상이라는 것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심판’의 채찍이란 어디까지나 단지 구원의 관문(關門; 호 2:17[15])이 되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 인식은!! 인류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로 보는 경우에는 요지부동의 진실성을 가진다. 이는 분명 역설(逆說)의 진리이다. 말하자면 이 경우,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이란 인간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고육지계’(苦肉之計)로서 일종의 ‘사랑의 채찍’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는 ‘심판의 신’이 결코 아니시고(!!) ‘구원의 신’이시다.

이러한 신학적 각성에서 볼 때, 시 10:17-18은 시 9-10편의 대 결론(大 結論)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오, 야훼여! 주님은 약자들의 간절한 애원을 들어 주시는 분,

그들, 약자들의 마음을 굳세게 붙들어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시는 분,

고아와 억압받는 자들을 변호해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의 공포가 없게 하시는 분!


바로 이 분이 시내 산, 즉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에게 그 산을 떠나 가나안 행군을 시작하기 직전(直前)에 자신의 본질을 계시(啓示)해 보여주신 분, <긍휼의 신>(엘 라훔, el-rahum), 그분이신 것이다.

‘긍휼’(矜恤, 히브리어 ‘라훔’ ???)의 원(原) 의미는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말에서 유래(由來)되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은 ‘부성 속성’(父性 屬性)이라기보다는 ‘모성 속성’(母性 屬性)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른 바, 자궁 속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한 다음, 하늘이 두 쪽 나는 것 같은 진통(陣痛)의 아픔을 느끼며 생명을 만들어 세상으로 내어보내는[출산하는] 기능을 하는 그런 것이다. 즉 하나님의 긍휼 본질은 바로 이러한 모성(母性)의 자궁(子宮) 속성을 가진다는 의미의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모성’(母性) 속성, 즉 ‘부성(父性)’ 속성이 아니라 ‘모성’(maternity) 속성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간결하게 묘사된 성서본문은 구약의 경우는 출 33:19, 그리고 신약의 경우는 요 3:16이라고 생각된다.


출 33:19; 야훼는 은혜를 베풀어야 할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히(불쌍히) 여 길 자는 긍휼히(불쌍히) 여기신다.

요 3:16;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사 독생자까지 주셨다. 이는 그를 믿고 의 지하는 자는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바로 이러한 ‘은혜 베푸심’ ‘불쌍히 여기심’ ‘사랑하심’을 통하여 입증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히 문자적인 의미의 ‘똑같은 공평함’을 의미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김없이 ‘생명구원’을 잉태, 양육, 진통,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기어이 이루어내고야 마는 그런 구원의 완성을 전제한 ‘공정’ ‘공평’ ‘올곧음’을 의미한다. 즉 구원의 완성이 없는 것은 그 어떤 ‘올곧음’이라도 ‘공의’ 또는 ‘정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義, ‘체다카’)는, 그러므로, 이와 같이 반드시 ‘구원’의 결실과 완성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하여, 허물 많은 우리는 기어이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으며 다가가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언제나 약한 자의 편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편 9-10편 시인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의 신학은 시 10:17-18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야훼 하나님은 <약자(弱者)들의 간원(懇願)을 들어주시는 분> <약자들의 마음을 굳게 붙들어주시는 분> <약자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시는 분> 그러므로 그분, 야훼 하나님은 약자(弱者)들을 변호해 주시는 분이시고 따라서 이 땅에서부터 억압의 공포를 제거해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러한 약자의 ‘편’이 되어주시는 분이 ‘공의’(公義)의 하나님이신 야훼이신 것이다.